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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설]중년 연애,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yellowmashmallow 2024. 9. 9. 00:54
50대 이상 중년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끝사랑’(JTBC).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마침내 등장했다. 중년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그것도 광복절에 시작하다니, 유교보이와 유교걸들에게 반세기 넘게 씌워졌던 억압의 굴레를 끊겠다는 해방의 선언인가, 혼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의미를 부여하며 티브이를 틀었다.

헉, 비연예인이라더니 출연자들의 외모가 너무 수려했다. 화면 한번 보고, 거울 한번 보고, 이십년 넘게 함께 살아준 배우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일련의 과정이 나도 모르게 이어졌다.

이러라고 만든 프로그램인가? 그다음에 배우자 얼굴 한번 보고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니 그러라고 만든 프로그램은 아닌 거 같다.

 

온라인 수사대가 이름과 나이만 공개된 출연진들의 신상을 벌써 찾아내 시니어 모델, 뷰티 유튜버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게 알려졌다.

현실 오십 대 같지 않다는 비판도 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당신의 바로 앞에 앉아있는 현실 오십 대를 즐겁자고 만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다면 견딜 수 있겠는가.

또한 ‘영 피프티’라는 말이 요즘 쌍욕을 먹고 있지만 분명 우리 세대는 우리의 부모 세대와는 다른 욕망과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변화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들을 보면 노화로 인해 낮아진 외모 자존감을 보정하는 데도 은근히 도움이 된다. ‘야! 나두 관리하면 저렇게 될 수 있어!’

 

중년 이후의 연애는 쉽지 않은 주제다. 내 주변만 봐도 또래 모임을 하면 4인 테이블에 한명은 비혼이고 40대로 내려가면 3분의 1은 비혼인 것 같다.

싱글 라이프 비율은 북미나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중년의 연애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보수적이다.

데이팅 앱을 쓰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이삼십 대 때처럼 매칭을 주선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돈이든 경력이든 취향이든 쌓은 게 많은 중년들을 잘못 연결해 줬다가 욕먹는 건 둘째 치고 소개받는 당사자가 상처 입는 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가족주의가 여전히 강하다 보니 자녀가 있는 싱글들은 연애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는 중년 연애 프로그램 ‘끝사랑’ 1회가 그 많은 연애 프로그램과 가장 달랐던 점도 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부분이었다.

자식들이 아빠나 엄마가 홀로 자신을 키운 시절을 떠올리며 새 출발을 독려하는 글을 낭독할 때 출연자들은 진짜 눈물을 철철 흘렸다.

설렘 뿜뿜이어야 할 연애 프로그램에 자식이 등판해 눈물 쏟게 하다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이 자식 있는 싱글들의 가장 큰 고민인 만큼 현실을 가리지 않고 보여준 셈이다.

그나마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성인인 듯한데, 미성년을 키우는 싱글이 연애 시장에 나오는 건 죄악시되는 분위기까지 있으니 또래의 비혼자들이 연애할 수 있는 ‘인재 풀’이 부족해지는 중년 연애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프로그램까지 나오는 걸 보면 중년 이후의 연애를 보는 사회적 시선도, 당사자들의 욕구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꼰대력이 강화되는 것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으면 태극기를 들고나와 국가의 미래를 탄식하는 것도 결국은 모두 나이 들며 외로워서 치는 몸부림 아니겠는가.

‘끝사랑’을 보면서 이들의 눈물에 마음이 찡했던 이유도 십수년간 홀로 자식을 키우며 꾹꾹 눌러 담았던 외로움이 화면 밖으로 툭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건강한 노화에 필수가 친밀한 관계이고 친구들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큼 친밀하고 든든한 관계가 있겠는가. 고령화 사회의 건강보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도 중년 이후의 연애는 국가가 나서서 장려해야 할 판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연예인급 외모를 자랑하면서도 “이런 데 살면 앓던 병도 낫겠다”는 지극히 중년다운 비유를 썼다가 지병 체크를 당하기도 하고, 감동스러운 편지의 글자가 안 보여 다른 출연자의 돋보기를 빌려 쓰기도 한다. 뼈 때리는 현실에 공감하며 이들이 청년의 것만큼 달달하고 중년의 것처럼 담백한 연애에 성공하길 응원한다. 이런 프런티어들이 닦아 놓은 길에서 나도 ‘범천’ 님같이 훤칠한 상대를 죽기 전에 만날 기회가 생길지 누가 아나. 그날을 위해서 빠직 소리가 날 듯 만날 인상 쓰며 만들어진 이마 주름을 펴고 ‘정숙’님처럼 웃는 얼굴로 살아가야겠지. 이렇게 또 하나, 중년의 교훈을 배운다.

 

김은형 문화데스크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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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연애,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마침내 등장했다. 중년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그것도 광복절에 시작하다니, 유교보이와 유교걸들에게 반세기 넘게 씌워졌던 억압의 굴레를 끊겠다는 해방의 선언인가, 혼자 귀신 씻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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